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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과 일기/영화

가장 가혹한 ‘자기 착취’의 채찍질: 영화 위플래쉬(2015)와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2012)

본 내용은 2017년도 1학기 서울대학교 글쓰기의 기초 강의에서 제출한 과제물을 수정한 것입니다. 

위플래쉬(2015) 포스터

 

   최고의 드럼 연주자를 꿈꾸는 소년 앤드류와 그의 한계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플랫처 교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위플래쉬는, 영화 <라라랜드>의 대성공으로 뮤지컬 영화계의 라이징스타로 떠오른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처음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작품이다.

  유쾌한 뮤지컬 영화의 전형인 <라라랜드>와는 달리, <위플래쉬>는 ‘채찍질’이라는 뜻의 제목에 걸맞게 한 편의 스릴러물을 방불케 하는 두려운 분위기가 전반에 깔려있다.

긴장감을 고조 시키는 ‘더블 타임 스윙’의 드럼 소리, 앤드류가 손이 터지도록 드럼을 치면 드럼 스틱에 스미다 못해 사방에 흩뿌려지는 핏방울, 플랫처 교수의 비상식적인 폭언과 폭행. 갖가지  요소들이 모여 살 떨리게 치열한 분위기를 그려낸다.

 

감독 Damien Chazelle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감각적 효과도, 폭군 플랫처의 광기도 아닐지도 모른다.

플랫처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앤드류의 도를 지나친 자기 고문이, 어쩐지 낯설지 않게 느껴지면서 섬뜩함이 배가된다.

스스로를 괴롭혀야 할 정도로더 높은 성취를 갈망하고, 경쟁에서 도태되기를 두려워하는 앤드류는 피로사회의 극한에 처한 우리의 자화상과 같기 때문이다.

 

네이버 책 페이지: 피로사회(2012, 한병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58823

 

피로사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책으로, 독일의 주요 언론 매체가 주목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성찰을 담

book.naver.com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2012)에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를 ‘성과사회’로 정의한다.

   과거 산업화의 등장과 함께 도래한 ‘규율사회’가 금지, 명령, 법률 따위로 사람들을 통제하던 부정성의 사회였다면, 후기산업화사회의성과사회’는 그에 반해 탈규제를 제창하며 사람들에게 ‘할 수 있음’을 주입하는 긍정성의 사회이다.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이전 규율사회에서 외적인 지배기구들에 의해 이뤄진 노동 착취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성과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뭐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성과의 미비는 개인을 곧바로 낙오자로 전락시킨다.

   성과사회의 성과주체(즉 개인)들은 규율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진화한 것으로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규율을 새로이 내면화하면서 낙오자가 된 자신을 자책하며 우울감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위플래쉬>는 플렛처의 지배 하에 있는 스튜디오밴드라는 성과사회에서 고통받는 성과주체들의 모습을 앤드류를 중심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플렛처 교수(J.K. Simmons)

 

  플렛처 교수는 성과사회의 파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성과사회의 대표적 특징은 무한한 긍정성인데, 규율사회를 대표하는 '금지'가 갖는 부정성은 사회의 생산성이 일정한 수준에 부딪히면 넘어서기가 힘든 반면 성과사회가 가진 능력의 긍정성은 생산성에 한계를 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연주자들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고 그런 제자들에게 온갖 악담은 물론 물리적 폭행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연주자들이 노력만 한다면 할 수 없는 것은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연주자들을 낙오자로 치부하여 비난하는 것이다.

 

   그는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가 ‘버드맨’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존스가 그의 머리에 던진 심벌즈 때문이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자신의 교수행동을 합리화 한다.

   플렛처가 제자들이 도달하기를 원하는 ‘찰리 파커’의 경지는 사실상 모호한 기준이어서 그는 보다 어려운 도전과제를 ‘한계가 없이’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요구한다. ‘존스가 던진 심벌즈’라는 선례를 따라하기 위해 정신적 , 신체적 폭력을 가하면서.

   그는 연주자들의 능력을 긍정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 했을 때 더 심하게 비난을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고 해로운 말이 ‘그만하면 잘했어’야."

   플렛처의 이 대사가 무한한 긍정성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과에 대한 보상을 아주 잠시 즐길 틈도 없이, 능력의 긍정성은 새로 달성해야할 과제를 바로 또 제시한다.

 

혹독한 연습의 혈흔이 남아있는 드럼스틱

 

 

   무한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성과사회가 피로사회로 변모하는 비극은, 성과주체들의 ‘자기 착취’로부터 시작된다.

  성과주체들은 모두 타자의 강요가 아닌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들이지만,‘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규율을 받아들인 성과주체에게 있어서는 그 자유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극심한 노동의 착취를 스스로 가능하게 한다.

   <위플래쉬>의 스토리는 앤드류의 자기 착취가 극심해지는 과정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자기 착취가 심화되는 과정은 가시적으로 그가 흘리는 피의 양으로도 알 수 있다.

   플렛처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연습을 하며 흘리는 것은 땀뿐이었다.   
   그 이후 앤드류의 손에는 반창고가 한두 개 늘어나고, 나중엔 피가 사방에 튀기도록 드럼을 치다가
   심지어는 공연장에 가다가 심각한 교통 사고로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이 공연장에 도착한다.

   자기 착취의 형태가 꼭 신체적인 고통인 건 아니지만, 이 노골적인 연출이 자기 착취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앤드류와 같이 성과 사회에서 자기 착취를 통해 생존하는 성과주체로서, 우리는 그의 고통이 마냥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모두 일상적인 자기 착취에 저마다 지칠 대로 지친 삶을 살고 있을 ‘피로사회’의 일원으로,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습관화된 자기 착취를 은연 중에 인식하고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플랫처는 자신 때문에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에 이른 제자 션 케이시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거짓말 한다. 이는 이후 더넬런에 가는 길에 일어난 앤드류의 교통사고에 대한 복선, 부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거대한 트럭에 부딪히는 순간,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와 단둘이 영화관에 가던 순수한 아들이었고,
   수줍게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데이트를 청하던 니콜의 연인이었던,
   본래의 앤드류는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는, 피를 뚝뚝 흘리며 전복된 차에서 기어 나와 경연장으로 달려가면서,
   본래의 앤드류는 극한의 자기 착취 상태에 도달함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교통 사고 장면 전후에 앤드류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거듭한다.

   뻔히 제시간 안에 경연장에 도착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갈 수 있다’라고,
   손에 스틱을 제대로 쥐고 있지도 못하는 상태이면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애써 고집을 피운다.
   할 수 없어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플렛처가 주입시킨 성과를 향한 맹목적 자세가 앤드류의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를 형성시켰고,
   그가 가진 자유는 결국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 돌변했다.

 

 

   "피로사회의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 <피로사회> 중

  이러한 한병철의 의견에 따른다면 앤드류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파괴적 자학은 그의 우울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앤드류는 셰이퍼 음악 학교에서 제적되고 다시 예전의 삶을 되찾으려 노력해보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그 전의 앤드류는 더넬런에서의 경연 날 죽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파멸을 불러온 플랫처를 다시 만나 그가 여전히 폭력적인 교육자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도, 플렛처의 공연 제의를 거절하지 못한다. 그 공연에 니콜을 초대하는 통화를 하는 장면에서 또다시 상처투성이가 된 앤드류의 손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이미 습관화된 자기 착취의 굴레에서도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니콜과의 통화도 이전 상태로의 회복(니콜과의 재회를 포함)에 대한 앤드류의 희망을 낙담시켜 버렸다.

   그는 니콜에게 이별을 고함으로써 자학하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자책과 인간적 유대의 결핍이 되어 더 큰 우울감을 형성했다.

 


 

    이 영화의 결말은 플랫처에 대한 앤드류의 승리, 내지는 천재 드럼 연주자로 새롭게 태어난 앤드류의 성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과사회의 명령에 대한 앤드류의 철저한 패배이고, 인간적 유대를 상실한 채 평생을 우울증 환자로 살아가게 될 그의 실패이다.

 한 번 더 말하자면 플렛처에 의해 태어난 또 다른 우울한 성과주체, 션 케이시의 죽음은 앤드류의 마지막을 예기한 것이다.

 

“플렛처는 항상 그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앤드류는 슬프고 텅 빈 사람이 되어 30대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실제로 감독 데이미언 셔젤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스토리 이후 플랫처와 앤드류의 행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위플래쉬>에 대한 국내 관람객들의 후기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앤드류가 바친 열정을 찬미하면서 그 과정을 청춘의 치열함으로 미화하거나 우리가 본받아야할 것인 양 이야기하고 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착취를 종용하는 성과사회의 패러다임에 무감각하게 종속되어 있을까.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은 모두 건전한 자아실현과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 착취의 경계에서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행복한 성과주체, 아니 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나의 삶 어딘가에 침투해 있을지도 모르는 플렛처에게 무방비하게 휘둘리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 내 안의 순종적 앤드류가 그에 반응해 폭주하지 않도록 각자의 '성취'에 대한 기준을 바로 정립해야할 것이다.

 

네이버 영화 페이지: 위플래쉬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9632

 

위플래쉬

최고의 드러머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는 음악대학 신입생 앤드류는 우연한 기회...

movie.naver.com

네이버 책 페이지: 피로사회(2012, 한병철)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58823

 

피로사회

성과사회는 우울증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책으로, 독일의 주요 언론 매체가 주목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성찰을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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